[인사이드MLB] 뉴욕 양키스의 비공식 영구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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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MLB] 뉴욕 양키스의 비공식 영구결번

최고관리자 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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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5일. 뉴욕 양키스는 데릭 지터의 등번호 2번을 영구결번으로 공식 지정했다.

2003년 이후에만 영구결번 6개(42 마리아노 리베라, 6 조 토레, 51 버니 윌리엄스, 46 앤디 페티트, 20 호르헤 포사다, 2 데릭 지터)가 새로 추가된 양키스는 이로써 한자릿수 번호가 모두 동났다. 21개의 영구결번과 22명의 영구결번 선수는 NBA 보스턴 셀틱스와 함께 미 프로스포츠 최고 기록이다(8번은 빌 디키와 요기 베라의 공동 영구결번).

22명의 영구결번 선수 중 양키스의 공식 주장이었던 선수는 6명이다. 1922년 양키스는 팀 연봉 총액의 절반에 가까운 5만2000달러에 재계약한 루스를 공식 주장으로 임명했다. 시즌 전 커미셔너가 금지한 순회경기에 참가했다가 6주 출장 정지를 받은 루스는 5월21일 시즌 첫 경기에 나섰다. 하지만 5월26일 경기에서 퇴장 명령을 내린 주심의 얼굴에 흙을 뿌리고, 야유하는 관중과 싸우기 위해 스탠드에 뛰어드는 대형 사고를 일으켜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주장에서 해임됐다.

이후 양키스는 '주장의 저주'가 이어졌다. 1935년 공식 주장이 된 루 게릭은 불치의 병에 걸려 1939년 비운의 은퇴를 했고, 1976년 게릭 이후 무려 37년 만에 공식 주장으로 임명된 서먼 먼슨은 1979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1985년 22승을 달성하고 투수 최초로 주장이 된 론 기드리는 곧바로 부진이 시작되며 3년 후 은퇴했고, 1991년 10번째 공식 주장에 등극한 돈 매팅리는 1995년 끝내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없이 은퇴했다.

매팅리가 은퇴하고 7년이 지난 2003년. 양키스는 지터를 11번째 공식 주장으로 임명했다. 지터는 역대 가장 긴 재임 기간(10년)을 보내고 화려하게 유니폼을 벗었다.

매팅리와 지터의 사이, 양키스는 양키스 역사상 가장 강력한 리더십을 선보인 비공식 주장이 있었다.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가 "나의 전사(warrior)이자 양키스의 전부"라고 불렀던 폴 오닐이다.

1963년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태어난 오닐은 1981년 4라운드 지명을 받고 꿈에 그리던 신시내티 레즈의 유니폼을 입었다. 신시내티의 감독 겸 선수였던 피트 로즈는 "조만간 오닐이 신시내티를 대표하는 최고의 스타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로즈가 말한 날은 오지 않았다.

1990년 루 피넬라 감독과 함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오닐은 1991년 데뷔 후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270 28홈런 91타점) 생애 첫 올스타전에도 출전했다. 하지만 이듬해 또 부진했다. 1993년 양키스는 버니 윌리엄스에게 풀타임 자리를 주기 위해 중견수 로베르토 켈리(28)를 신시내티로 보내고 우익수 오닐(30)을 받아왔다.

신시내티에서 오닐이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화를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신시내티 덕아웃의 음료수통은 삼진을 당한 후 방망이를 들고 찾아오는 오닐에 의해 남아나지 않았다. 피넬라 감독과 롭 디블도 다혈질로 유명했던 신시내티 클럽하우스는 빌리 마틴 감독과 레지 잭슨이 충돌했던 1970년대 '브롱스 동물원'(bronx zoo)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오닐에게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알려준 사람이 나타났다. 양키스 벅 쇼월터 감독은 오닐의 라커를 매팅리의 옆 자리에 배정했다. 오닐은 당대 최고의 스타이자 리더였던 매팅리로부터 분노 조절과 함께 양키스 선수가 되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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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키스 이적 첫 해인 1993년, 오닐은 서른 살의 나이로 첫 3할 타율을 기록했다. 파업 시즌이 된 이듬해는 앨버트 벨(.357 .438 .714)과 프랭크 토마스(.353 .487 .729)를 제치고 타격왕에 올랐다(.359 .460 .603). 그리고 1998년까지 6년 연속 3할 타율을 이어갔다. 양키스에 좀더 일찍 오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신시내티 8년 .259 .336 .431, 양키스 9년 .303 .377 .492).
 
1995년 디비전시리즈에서의 충격적인 리버스 스윕 패배(시애틀 상대 2연승 후 3연패) 이후 더욱 단단해진 오닐의 투지는 보스턴을 만나면 더 불타올랐고(통산 보스턴전 .305 .382 .527) 1996년 월드시리즈 5차전에서는 햄스트링 부상으로 제대로 뛸 수 없는 상황에서 1-0 승리를 완성하는 끝내기 호수비를 선보였다.
 
1999년 월드시리즈 4차전. 오닐은 경기 몇 시간 전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출장을 강행했다. 그리고 팀의 우승을 확정지은 다음에야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양키스가 5번 월드시리즈에 올라 네 차례 우승을 차지한 1996년부터 2001년 사이, 양키스의 클럽하우스에서 열리는 미팅은 대부분 오닐이 소집하는 것이었다.

고질적인 등 부상과 싸우며 2000시즌을 마감한 오닐은 다년 계약을 마다하고 양키스와 1년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고통이 사라지지 않으면 시즌 후 은퇴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2001년 월드시리즈 5차전 8회말. 양키스 팬들은 홈에서의 마지막 타석일지도 모르는 오닐에게 오랜 시간 박수를 보냈다. 경기는 9회말 스캇 브로셔스의 극적인 투런홈런으로 동점이 됐고, 오닐은 10회말 다시 한 번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7차전 마리아노 리베라가 루이스 곤살레스(애리조나)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는 것으로, 오닐의 6번째 우승은 완성되지 않았다. 오닐이 떠난 후, 양키스는 그가 있었을 때의 단단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오닐이 은퇴한 후 양키스에서는 그의 등번호인 21번이 암묵적인 영구결번이 됐다. 2008년 라트로이 호킨스가 이 사정을 모르고 달았다가 팬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보름 만에 떼기도 했다(양키스타디움 관중들은 호킨스가 21번을 달았다는 이유로 그가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야유를 보냈다). 1999년 양키스에 입단한 로저 클레멘스가 자신의 평생 등번호였던 21번을 더 이상 달지 못하게 된 것도 오닐 때문이었다.

차후 양키스가 명예의 전당 선수도 아니며 양키스에서 9년밖에 뛰지 않은 오닐의 21번을 영구결번으로 만들 것인지는 알 수 없다(7년밖에 뛰지 않았지만 9번이 영구결번이 된 로저 매리스는 홈런 신기록과 두 번의 리그 MVP를 공로로 인정 받았다). 그러나 양키스 팬들에게 오닐의 21번은 이미 영구결번이나 다름없다.

뉴저지 출신으로 지터를 우상으로 여기고 자란 토드 프레이저(31)는 예상을 깨고 보스턴이 아닌 양키스 유니폼을 입게 됐다. 역시 신시내티 입단 후 줄곧 21번을 달았던 프레이저는 오닐에게 21번 사용을 허락해달라고 할 계획이라고. 오마 비스켈은 2010년 베네수엘라 유격수의 선조인 루이스 아파리시오의 11번이 영구결번인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입단하면서 아파리시오에게 11번을 달고 싶다고 부탁해 허락을 얻은 바 있다.

1973년부터 2010년까지 37년의 재임 기간 동안,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가 가장 사랑한 두 명은 매팅리 그리고 오닐이었다. 생전 스타인브레너는 오닐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지터가 양키스의 얼굴이라면 양키스의 심장은 오닐이다."

아무래도 프레이저는 21번이 아닌 다른 번호를 고르는 것이 나을 듯하다.

기사제공 김형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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